
상상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아이의 상상력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하루에서 조용히 자라납니다. 멍하니 있는 시간, 작은 사고 하나, 혼자만의 놀이, 책장을 넘기는 순간까지. 판타지 그림책은 이런 일상의 틈을 포착해 아이의 마음을 새로운 세계로 이끕니다. 이번 글에서는 ‘상상’을 키워드로, 현실의 경험이 어떻게 판타지가 되는지를 보여 주는 판타지 그림책들을 소개합니다.
지루함에서 피어나는 상상
《너무너무 지루한 지룽이》
베티나 오브레히트 그림 · 율리 푈크 글 / 북멘토

『너무너무 지루한 지룽이』는 아이들이 자주 느끼는 감정인 ‘지루함’을 상상력의 출발점으로 삼은 그림책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던 에밀 앞에 나타난 지룽이는 더 지루해질 것만 같은 존재지만, 뜻밖에도 에밀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책은 지루함을 없애야 할 감정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멈춰 있는 시간 속에서 이야기가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장난감도, 인형도, 평범한 방도 에밀의 상상 안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얻지요.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아이에게는 스스로 즐거움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어른에게는 기다림의 가치를 전하는 작품입니다.
작은 사고가 만든 큰 이야기
《이마에 알이 생겼어》
엔히키 코제르 모레이라 그림 · 주아나 바라타 글 / 노란상상

신나게 놀다 넘어져 이마에 알이 생긴 파코.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이 사건은, 파코의 상상력을 만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혹시 이 알에서 무언가 태어나지 않을까? 파코는 백과사전을 뒤지며 알의 정체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이 그림책의 매력은 실수와 아픔을 상상의 재료로 바꾼다는 점입니다. 현실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은 아이의 호기심을 만나 자연스럽게 판타지로 확장됩니다. 아이들은 이 책을 통해 넘어짐과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그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를 상상해 보게 됩니다.
놀이처럼 펼쳐지는 상상의 여행
《빵 빵 무슨 빵?》
김중석 그림·글 / 킨더랜드

『빵 빵 무슨 빵?』은 빵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상상의 출발점으로 삼은 그림책입니다. 빵 포장지, 노트, 색종이를 오려 붙인 콜라주 그림은 따뜻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전합니다. 빵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장면이 펼쳐지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놀이로 이어집니다.

이 책은 읽는 책이라기보다 함께 대화를 나누며 즐기는 책에 가깝습니다. 아이와 부모가 번갈아 상상을 더하다 보면, 일상의 소재가 얼마든지 판타지가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혼자여도 충만한 세계
《미스터 캣의 어느 날》
엔히키 코제르 모레이라 그림·글 / 주니어RHK

텅 빈 세상에 홀로 사는 미스터 캣은 외롭지 않습니다. 차를 끓이고, 책을 읽고, 고요한 일상을 즐기던 그의 손끝에서 마법처럼 세계가 펼쳐집니다. 단순한 선과 강렬한 색 대비는 상상의 힘을 더욱 또렷하게 보여 줍니다.

이 작품은 ‘혼자 있는 시간’이 결핍이 아니라 충만함일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찾아왔을 때, 그 세계를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여유 또한 전합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 독자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판타지 그림책입니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다
《K의 모험》
이재경 그림·글 / 고래뱃속

『K의 모험』은 상상 속 세계의 주인공이 현실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던 이야기 밖으로 나온 K는, 예측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진짜 모험을 시작합니다.

이 책은 묻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은 정말 답답하기만 한 곳일까요? 불확실성과 위험 속에서 K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자유를 발견합니다. 상상과 현실을 전복시키는 이 관점은 아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상상은 계속 이어진다
《츠츠츠츠》
이지은 그림·글 / 사계절

『츠츠츠츠』는 『이파라파냐무냐무』의 세계관을 잇는 이야기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판타지 그림책입니다. 털숭숭이와 마시멜롱들이 도착한 낯선 섬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위태로운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의 등장과 함께 이야기는 긴장감을 높여 가지만, 작가는 끝까지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게 만듭니다.

이 책의 진짜 매력은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위협적으로 보였던 존재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며, 독자는 자연스럽게 처음 장면으로 되돌아가 다시 이야기를 확인하게 됩니다. 『츠츠츠츠』는 상상이란 겉모습 너머를 바라보는 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아이의 눈높이에서 섬세하게 전하는 작품입니다.
《책 속으로 들어간 날》
그레이스 린 그림 · 케이트 메스너 글 / 보물창고

『책 속으로 들어간 날』은 책 읽기의 경험을 그대로 판타지로 확장한 그림책입니다. 집 안에만 있어 지루함을 느끼던 앨리스는 책 속 그림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며 여행을 시작합니다. 열대 우림, 사막, 바다, 우주까지 이어지는 장면들은 상상의 속도가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보여 줍니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아이를 수동적인 독자가 아닌 ‘능동적인 탐험가’로 그린다는 점입니다. 토끼를 따라 어쩔 수 없이 모험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 발 내딛어 여행을 선택하지요. 또한 그림 곳곳에 숨겨진 장면들은 여러 번 읽을수록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이 책은 아이에게 책이 곧 세계가 될 수 있음을 경험하게 합니다.
《FOUND 바닷가에 간 날의 기적》
샘 어셔 그림·글 / 주니어RHK

『FOUND 바닷가에 간 날의 기적』은 현실과 상상이 부드럽게 겹쳐지는 순간을 담은 그림책입니다. 아이와 할아버지가 바닷가에서 보낸 하루는 한 편의 여름 판타지처럼 펼쳐지지만, 그 중심에는 ‘선택’과 ‘배려’라는 현실적인 가치가 놓여 있습니다.

아기 바다표범을 돕기 위해 계획했던 즐거움을 내려놓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깊이를 더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포기한 즐거움이 상상의 세계에서 다시 되돌아온다는 설정입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상상이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현실의 마음이 반영된 또 하나의 진실한 세계임을 보여 줍니다. 맑고 투명한 수채화는 이 메시지를 더욱 오래 마음에 남게 합니다.
아이와 이렇게 대화해 보는 건 어떨까요?
-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장면은 무엇이었어?
- 만약 네가 주인공이라면, 다른 선택을 해 보고 싶을까?
- 이 이야기가 현실과 닮아 있는 부분은 어디일까?
- 너의 하루에서도 이런 상상이 시작될 수 있을까?
상상은 이미 아이 안에 있습니다
판타지 그림책은 새로운 세계를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이미 아이 안에 있는 상상을 깨우는 책입니다. 지루함, 실수, 혼자 있는 시간, 책 한 권—그 무엇도 상상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한 판타지 그림책들이 아이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며, 상상이라는 문을 열어 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