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서, 아이보다 제가 더 긴장했던 책이 바로 데이비드 위즈너의 글 없는 그림책이었습니다.
글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잠시 멈칫했습니다. 줄거리를 설명해 주어야 할 것 같고, 정답을 찾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달랐습니다. 아무 망설임 없이 그림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 책에는 ‘잘 읽는 법’보다 ‘자유롭게 읽는 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요.
데이비드 위즈너의 글 없는 그림책 읽기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읽는 방법
글 없는 그림책(wordless picture book)은 처음 접하면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글자가 없으니 어떻게 읽어야 할지, 무엇이 맞는 이야기인지 망설여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위즈너의 그림책을 몇 장만 넘겨보면 곧 알게 됩니다. 이 책들은 ‘잘 읽는 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보고, 느끼고, 이야기하면 되는 책이라는 것을요.
제가 개인적으로 글 없는 그림책을 좋아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지점 때문입니다. 아이와 마주 앉아 책을 펼치는 순간, 어른이 준비해야 할 답안지도,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해석도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오직 그림과 아이의 말뿐입니다.
글 없는 그림책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독자가 느낀 이야기가 곧 이야기의 전부라는 점입니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대표작 《자유 낙하》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아이가 책을 읽다 잠이 들고, 바람이 불어오자 덮고 있던 체크무늬 담요가 들판의 네모난 구획으로 변합니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그 들판이 체스판이 되고, 소년은 킹과 퀸, 비숍 같은 체스 말 인간들과 마주합니다.

이 장면을 보며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책 페이지가 양탄자처럼 떠다녀요.”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제목이 자유 낙하잖아요. 꿈속에서 환상 세계로 떨어진 거예요.”
어느 쪽도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 작가가 정답을 정해 두었다면 그림 위에 글을 써 두었을 것입니다. 글이 없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를 독자에게 맡기겠다는 작가의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와 함께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여긴 체스 나라가 아니라 외계 행성이에요”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이 책은 외계 행성 이야기가 됩니다. 어른은 고쳐 줄 필요도, 정답을 알려 줄 필요도 없습니다. 아이가 그렇게 읽었다면, 그것이 맞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도 독자가 이야기를 완성한다고 말합니다
데이비드 위즈너 작가는 혼북 매거진(Horn Book Magazine)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한 도서관에서 아이가 그의 글 없는 그림책을 읽으며 페이지마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적은 종이를 끼워 두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숙제를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아이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그린 그림은 이야기의 방향을 제시할 뿐이고, 최종적인 이야기는 아이와 양육자, 그리고 그림이 함께 만들어 갑니다.”
이 말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책은 이미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읽는 순간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라는 뜻이니까요.
글 없는 그림책의 또 다른 작가 에런 베커 역시 같은 생각을 전합니다. 《머나먼 여행》(웅진주니어)에서 그는 일부러 주인공 소녀의 표정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각자의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같은 장면이라도 어떤 아이는 무서울 수 있고, 어떤 아이는 신날 수 있습니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글 없는 그림책이 왜 여러 번 읽을수록 새로운지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글자를 찾지 말고, 그림을 천천히 읽어 주세요
그림책을 읽을 때 어른들은 종종 글자부터 찾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림책은 글보다 그림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글 없는 그림책을 만났다면, 오히려 마음을 내려놓고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 왜 이 인물은 이 장면에 있을까요?
- 배경과 시간은 왜 이렇게 표현되었을까요?
- 이전 장면과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요?
한 페이지를 네 칸으로 나누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중심 장면뿐 아니라, 왼쪽 아래나 오른쪽 위처럼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구석에도 작가는 힌트를 숨겨 둡니다.
만약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입니다.
아이에게 먼저 물어보세요.
아이들은 어른보다 그림을 훨씬 잘 보고 있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이미 준비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공을 바꿔 읽으면 책이 새로워집니다
《자유 낙하》의 주인공을 꼭 소년으로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반에 등장하는 용을 주인공으로 삼아 읽어 보셔도 좋습니다.
“잠들어 있던 소년이 체스 나라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주인공 용은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읽기 시작하는 순간,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모험담이 될 수도 있고, 약간 무서운 이야기나 코믹한 이야기로도 바뀔 수 있습니다.

글이 있는 그림책은 주인공과 화자가 정해져 있지만, 글 없는 그림책은 다릅니다. 내가 선택한 대상이 곧 주인공이 됩니다. 여러 번 읽은 뒤에는 주인공을 바꿔 다시 읽어 보세요. 같은 책이 전혀 다른 책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림책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자유 낙하》는 표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소리가 들리는 책입니다.

휘유우웅— 바람 소리
사르륵— 책장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소리
쿠르르릉— 담요가 땅으로 변하는 소리
글이 없어도 그림책은 결코 조용하지 않습니다. 벤야민 고트발트의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그림책》이라는 제목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2018년 칼데콧상을 받은 매튜 코델의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소녀》 역시 대사는 없지만, “왈왈”, “아우우” 같은 소리로 페이지가 가득합니다.
글자가 없다고 해서 ‘조용한 책’이라고 부르기에는, 글 없는 그림책은 너무 많은 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을 읽어 줄 때는 낭독자보다 이야기꾼에 가까워지면 좋겠습니다.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을 말로 풀어 주어야 한다는 부담은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2013년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 다니엘라 오닐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부모는 글 없는 책을 읽어 줄 때 오히려 더 많은 단어와 복잡한 대화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잘 읽고 있는지 확신이 없기 때문에, 아이의 경험과 연결하고 질문을 던지며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다람쥐가 있네.”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 오늘 아침에 마당에서 다람쥐 본 거 기억나?”로 이어질 때, 책은 아이의 삶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읽게 해 주세요
글 없는 그림책은 아이가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글자를 몰라도, 읽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른은 이야기를 만들어 주기보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역할을 하면 충분합니다. 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언제나 예상 밖이고, 때로는 어른보다 훨씬 풍부합니다.
글 없는 그림책은 silent book이라고도 불리지만, 아이와 함께 읽어 본 사람이라면 압니다. 이 책들이 얼마나 시끄럽고 활기찬지 말입니다.
이제는 조금 덜 말하고, 아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그 순간, 글 없는 그림책은 가장 풍성한 책이 됩니다.
글 없는 그림책을 읽어 주며 가장 크게 바뀐 건, 아이보다 어른인 저였습니다. 이야기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역할로 물러났을 때 비로소 책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글 없는 그림책은 조용한 책이 아닙니다. 페이지마다 상상과 질문, 웃음과 소리가 가득합니다. 오늘은 아이의 이야기를 ‘읽어 주는’ 대신, 그 이야기를 ‘들어 주는’ 독자가 되어 보셔도 좋겠습니다. 그 순간, 같은 책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요.